‘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말조심하란 경고인데, 이 속담에 엿듣기 좋아하는 사람들 속성도 반영되어 있다. 도청을 뜻하는 영어 단어로는 ‘wiretapping’ ‘phone-tapping’ ‘bug’ 등이 쓰이는데, 고전적 단어는 ‘eavesdropping’이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란 뜻을 보면, 도청은 동서고금을 통해 오랫동안 지속된 악습이다.

한국에서 사생활 염탐이나 정보 수집을 목적으로 한 도청 기록은 일제 강점기 전화선이 보급된 이후 등장했다. 한국전쟁 이후 주로 경찰이나 안기부(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저지른 것들이 많았다. 다음은 1956년 12월 9일자 ‘인권은 옹호되고 있는가’ 사설 내용의 일부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인권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가. (중략) 일제의 소위 ‘명치삼십삼년법률’에 의거한다 하여 전화를 도청하는가 하면 또 통신검열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사신을 뜯어보기 위하여 2200여만환의 예산으로 47명의 검열원을 둔다는 사실이 교통체신위에서 논란되고 있는 형편이다.”

인권 따윈 안중에 없던 시절. 1960년 5월 오정수 체신부 장관은 사찰계통 경찰의 국내외 전화 도청설과 관련, “앞으로 전화 도청은 일절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3년 뒤 민정당 경북도당 추진발기인대회 임시의장인 권모씨가 전화를 도청당해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군사정권 시절 도청 대상은 주로 야당이었다. 75년 2월엔 충남 온양경찰서 정보과 순경이 신민당 충남 제2지구당 간부회의를 도청하기 위해 무전기와 녹음기를 설치했다가 사전적발됐다.

88년엔 조직적인 도청의 실체가 드러났다.
김원기 원내총무는 이날 “안기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남산의 안기부 서울분실 내에 있는 기술보안단이라는 황색 5층 건물에서 광범위한 전화도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기부도 인정했다”면서 “그러나 안기부는 도청 중단 용의에 대한 적극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경향신문 1988년 10월 18일자, ‘안기부 전화도청’)

야당은 그해 9월 “당국이 지난 88년 5월 서울 각 전화국의 교환기 뒤에 블랙박스를 부착, 이를 광화문 전기통신공사 사옥 4층 전자교환기의 미니컴퓨터에 연결시켜 통화감시자의 번호·통화시각·통화상대방의 번호 등을 녹취, 도청에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92년 2월 당시 민주당 김대중 대표도 “정영주 전 한미연합사 작전처장이 갑자기 신병을 이유로 민주당 입당을 포기하고, 모든 당 간부의 전화가 도청되는 등 정치탄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77년 6월 23일자 경향신문 ‘도청 안방의 밀담도 척척, 그 기술 어디까지’ 기획기사. 국내외의 도청 기술과 수법이 자세히 나온다. (경향신문 자료)


미국에선 도청하면 워터게이트 사건이 연상되는데, 한국에선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우선 떠오른다. 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부산 초원복집에서 김기춘 법무부 장관,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이 모여 김영삼 민자당 후보 당선을 위해 관권 선거를 논의한 자리였다. 정주영 후보 쪽의 현대 직원과 안기부 직원이 공모해 도청했는데, 당시 언론은 관권선거보다 도청문제를 부각시켰다.

도청 하면 또 연상되는 게 2005년 터진 안기부 X파일 사건이다. 안기부는 90년대 비밀도청팀 미림을 만들어 91~94년, 94~97년 정계·관계·재계·언론계 등을 상대로 불법 도청했다. 삼성그룹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에 대선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사전모의’했다는 것과 검찰을 상대로 금품로비를 시도한 정황도 녹음됐다.
도청의 내용이 불법·비도덕적이란 점에서 초원복집 사건과 비슷했다. 이후 사법처리 과정도 유사하다. 이건희·홍석현 등 X파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법망을 피했지만, 이를 보도한 MBC 이상호 기자, 떡값 검사를 공개한 노회찬 전 의원은 사법처리됐다.

 

2005년 12월 이건희 삼성 회장 등 ‘안기부 X파일’사건에 연루된 삼성그룹 수뇌부 전원이 무혐의 처리되 자 11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X파일 공동 대책위원회가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기관들은 서로 닮아가는 걸까. ‘정당행사 녹음기 도청, 선관위가 선거법 위반’(경향신문 2004년 2월 28일자) 선관위 직원 도청 또 적발, 양구서 고성능 녹음기 몰래 설치 물의’(경향신문 2004년 3월 4일자), ‘지역 정치인 모임 공무원 도청파문’(경향신문 2008년 11월 6일자)처럼 중앙·지방정부 공무원들의 도청 시도도 잇따랐다.

국가간 도청문제도 외신란에 곧잘 나왔는데, 미국의 청와대 도청문제도 불거지곤 했다. 76년 10월엔 박동선 게이트와 관련,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미국 정보기관이 전자도청 장치와 비밀녹음 등을 통해 청와대에서 박동선씨 등과 대미의회 활동에 관한 회의를 했다는 첩보를 수집했다고 보도했다.
78년 4월 한·미간 갈등을 불러일으킨 도청사건이 일어난다. 월리웜 포터 전 주한 미대사가 미 CBS TV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한국대사로 부임하여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와대에 대한 도청장치가 돼 있었고, 나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 것.
보도 이후 한국에선 고교생부터 노인까지 참여한 대미 규탄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지금은 친미 집회의 선봉격인 대한상이군경회도 “우리의 주권은 어느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다”며 규탄 행렬에 동참했다.

 

1978년 미국 정보기관의 도청과 관련, 대미 규탄집회 소식을 전하는 경향신문 보도.


사생활 파헤치기 도청도 오랜 내력이 있다. 80~90년대 도청장치는 용산·세운전자상가 판매상들 사이에서 ‘제비 킬러’ ‘과부 킬러’로 불렸다. ‘아내 의심 처가 도청한 사위, 발길질한 장인 나란히 입건’(1999년 6월 2일자) 같은 기사들이 종종 사회면을 장식했다. 입찰 정보, 기업 정보를 빼내기 위한 도청도 숱하게 벌어졌다.

기자들도 도청한 기록들이 나온다. 2004년 1월엔 전북지역 일간지 기자가 열린우리당 김원기 상임의장실 회의용 탁자에 도청용 녹음기를 설치했다가 직원의 청소 도중 발견됐다. 우리당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자 기자는 “특종을 잡아보려고 (녹음기를) 붙였다”며 “경황이 없어 녹음기 설치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책이 궁해진 이 의장에게 헌책을 하기 위하여 등단한 박순석 의원이 의장과 속삭이는 것을 기자용 ‘레시버’로 도청한 바에 의하면, “글쎄 우리만 가지고는 숫자가 좀 모자립니다. 아, 야당에서 우르르 몰려나갈 때 표결을 해버렸으면 되는 건데….”(경향신문 1957년 3월 12일자 ‘기자석’ 중)

50년대 도청엔 별 거리낌이나 죄의식이 없었던 것 같다. 기시감! 민주당 도청사건과 관련, 연루의혹에 휩싸인 KBS가 30일 해명(?)이란 걸 내놓았다.
“수신료 문제와 관련,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이른바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이다. 녹음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이른바 벽 바깥에 귀를 대고 취재하는 ‘벽치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 귀 안에 도청장치’가 달린 ‘인간 레시버’라 할 만하다.

Posted by 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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