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데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때문인지 총기사건이 흔했다. ‘병영국가’에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위협하고 툭하면 총을 쐈다. 총기 관리 개념도 희박했다.
63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어느 부대의 만취한 운전병이 경기관총으로 동료 병사 4명을 쏴 중상을 입힌 사건이 나온다. 이 사병은 냇가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민가에서 기르는 돼지를 쏘아 돼지 주인과 시비가 붙었다. “그놈의 돼지 주인을 죽여야겠다”며 경기관총을 들고 나서다 동료들이 만류하자 벌어진 사건이다.

민간인들 목숨은 안중에 없는 사건들도 여럿 있다. 66년 5월 12일 밤 강원도 어느 마을에 파견된 최모 하사는 술에 취해 불 켜진 집마다 다니며 부락민 4명을 마구 쏘아 죽였다. 이 마을에서 사귀었던 여자의 집안이 결혼을 반대한 데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 사건에 대해 “한 사병이 멋대로 총질을 하여 무더기로 사람을 죽인 이번 사건은 군의 총기 사용에 대한 교육을 보다 강화해야 할 필요를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전주에서 일가족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 등은 군 지휘관들이 총기 관리에 보다 세심한 주의와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 인간 존중을 위해”라고 적었다.

인간 존중의 길은 쉽지 않았다. 82년 5월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한다. 13일 저녁 충남 서산군 모 부대 소속 최모 상병이 식당에서 술을 먹다 M16 소총으로 함께 있던 이웃 다방 종업원과 식당 주인 김씨 등 3명을 쏘아 죽였다. 다방 종업원이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돌아가려 하자 홧김에 쏜 것이다.

‘군대 내 총기사건’은 부지기수다. 60년대 언론에선 ‘하극상 사건’이라 불렀다. 이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급자들의 ‘가혹행위’가 참극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64년 2월 2일 미 제1군단사령부 소속 한국군 카투사가 근무상태가 나쁘다고 뺨을 때린 같은 한국 카투사 상사 2명을 사살했다. 다음달 1일 새벽 육군 모사단에선 김모 상병이 김모 병장과 이모 하사를 사살했다. 새벽 2시 불침번을 교대할 시간에 교대자인 이 하사와 김 병장을 깨웠다고 그들에게 뭇매를 맞은 데 격분해 벌인 일이다. 65년 8월엔 부산 동래 육군 모 경비중대에 이모 일병이 내무반에 뛰어들어 카빈 총을 난사해 동료 3명을 죽이고 자살했다. 이틀 전 병장-상병-일병으로 이어지는 연쇄 기합이 빚은 사건이다. 하급자들은 군 풍기가 문란하다는 이유로 야전용 곡괭이 자루로 얻어맞았다.
71년 11월 11일에도 저녁식사 뒤에 밥그릇을 제대로 닦지 않았다고 심한 기합을 받은 박모 상병이 내무반에서 잠자던 3명을 사살했다.

총기 난사자들의 공통점도 있다. 대부분 사고를 저지르고 자살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66년 6월 14일 새벽엔 장교한테 기합을 받자 앙심을 품은 황모 상병이 장교를 쏘아 숨지게 한 뒤 도주하다 자살했다.
앞서 여러 사례에서도 나왔지만 술도 난사의 원인 중 하나다. 69년 6월엔 영외에서 술을 먹고 들어온 윤모 하사가 잠자던 내무반원들에게 난사해 5명을 숨지게 했다.

 

공 하사의 총기 난사 사건을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술과 도박이라는 군기 문란에다 정신착란 증세가 빚어낸 사건도 있었다. 71년 1월 18일 서부전선에서 공모 하사가 M16으로 군인 2명과 부대 인근 주민 5명을 쏴 죽이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대 막사와 민간에서 노름을 하다 계속 돈을 잃자 홧김에 술을 먹고 벌인 일이었다. 정신착란 증세도 난사 이유로 분석됐다. 경향신문은 당시 “징병검사시 외적인 신체검사뿐 아니라 정신검사를 철저히 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2005년 6월 25일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연천 총기 난사 사건 희생 장병들에 대한 합동영결식에서 유족들이 운구되는 관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다. (경향신문자료)


70년대 이후부터 80년대까지 군대 총기 난사 사건은 드물게 보도됐다. 군대가 좋아진 것일까. 아래 기사를 읽으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9일 ‘총기 난사 참극‘이 빚어진 연천 최전방 GP 관할 육군 28사단에서 20년 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22일 뒤늦게 밝혀졌다.
군 관계자는 “지난 85년 2월 24일 새벽 28사단 예하 양주의 모 부대에서 박모 이병이 고참들의 폭력에 앙심을 품고 교대 근무를 마친 뒤 내무반으로 들어가 소총 수십발을 난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군사정권 때 발생한 사건이었고 철저한 보도통제가 있어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면서 “당시 병사 8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으며, 사망자 시신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 2005년 6월 23일자)

총기 난사 사건은 90년대 이후에도 종종 일어났다. 94년 10월 31일 경기 양주군 모 부대에서 벌어진 사건은 군당국에 충격을 줬다. 서모 일병이 사격장에서 K2 자동소총으로 중대장과 소대장을 조준사격하고, 현장에서 자살한 것. 군당국은 불우한 환경 때문에 상관에 대한 막연한 복수심을 키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 일병의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 내에서 하급자 한 명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잘 가르치지 못한다며 심한 질책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형은 “(동생이) 군생활이 괴롭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96년은 군으로서는 최악의 해였다. 내무반, 행정반, 식당, 취사장에서 5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2005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 중부전선 육군 모 부대 최전방 초소(GP)에서 벌어진 사건은 2000년대 이후 단일 사고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김모 일병이 25명이 자던 내무반에 수류탄 1발을 던지고, K-1 소총으로 수십발을 난사한 것. 8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욕설 등 언어폭력이 이유였다.

지난 4일 해병대 2사단 강화도 해안소초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는 수십년간 벌어진 사건들을 되풀이하고 있다. 상습적인 구타 등 가혹행위 정황이 확인됐다. 2009년부터 올해 3월 25일까지 해병 1·2사단 병원 진료기록 검토 결과, 구타 피해로 의심할 만한 고막 천공 등 증상으로 치료받은 환자가 943명이었다. 사고자 김모 상병은 대낮 음주를 했고, 총기 관리는 규정을 무시한 채 이뤄졌다.
후임병들은 선임 대우를, 선임병들은 후임 취급을 해주지 않고 마치 ‘유령인간’처럼 대하는 해병대의 악습 ‘기수 열외’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사고 전날 같은 사단 다른 해병대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향신문 김용민 만평


수십년간 이 수많은 가해·피해, 죽음의 기록 중 이른바 지도층·부유층 희생자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병역기피·회피 와중에 서민 자식들만 애꿎게 죽어나갔다. 80년에는 8명이 죽었어도 은폐한 전력이 있다. 수많은 군 의문사들은 여전히 미궁이다. 총기 사건과 관련, 해병대 지휘부는 각종 구타·가혹행위 사건을 축소·은폐한 혐의가 드러났다. 7월 7일자 김용민 만평은 이 현실을 말하고 있다.

Posted by 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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