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주식회사 측에서 동원한 10여명의 폭력배들에 의해 500여 노점상인들이 강제철거를 당하여 이에 반항하던 임신 3개월의 여자상인이 구타를 당한 끝에 중상을 입는 등 이날 무려 3시간여에 이른 폭력배와 상인들 간의 충돌로 남대문시장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1956년 8월 마지막 날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벌어진 일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의 한 대목이다. 강제철거 현장은 폭력배들의 주요 활동무대 중 하나였다. 경찰은 묵인하고 방관하는데, 폭력배들이 기승을 부리다 보니 이런 사설도 나왔다.



6월 19일 서울 명동3구역 재개발 반대 농성장에서 세입자들과 시민들이 농성장을 지키기 위해 용역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판자집 철거나 선거 간섭에는 누구보다도 용감한 우리 국립경찰이 어찌하여 깡패들 단속에는 그리도 무능하고 무성의한지 알 수 없는 일이다.(경향신문 1958년 6월 10일자, ‘깡패 단속을 다시 촉구한다’)


1960년대 철거 현장에서도 폭력배들이 활약했다. 성북구 정릉 배밭골 철거촌의 주민이 서울시장에게 보낸 글이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깡패로 편성된 철거반에 의해 건물 가구 등이 멸렬되어 안식처는 상실됐고 생존권이 말살됐습니다. 저희들 처자식은 풍찬노숙을 하고 갈 곳이 없습니다. (중략) 순환도로 공사가 중단된 채 스카이웨이의 신설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할 계획이 이룩됐다면 이에 수반한 사회대책도 강구돼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만이 희생될 수는 없습니다.(경향신문 1968년 5월 18일자, ‘건설 위해 안식처 뺏지말라’)


철거는 개발에서 비롯됐다. 폭력의 배후엔 국가 권력이 있었다. 외국인에게 보여줘선 안 된다는 강박을 가졌던 권력이 가난한 이들을 삶터에서 내몰았다. 1986~88년 수많은 곳에서 철거깡패와 전투경찰이 철거에 나섰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구속했다. 사당동, 신정동, 서초동 등 재개발지역 철거민 1000여명은 국회에서 ‘5·6 공화국 재개발 비리만행 폭로규탄 및 깡패철거 결사저지대회’를 가졌다. 어른들은 어린 자식들의 이마에 ‘철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쓰인 머리띠를 동여맸다. 80년 이후 철거현장에서 15명이 숨졌다. 

야만의 시대는 오래 지속됐다. 군사독재가 끝난 이후에도 강제철거로 사망하는 사람이 나왔다. 2007년 10월 12일 경기 고양시 한 공원에서 이모씨(당시 48세)가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씨는 붕어빵을 팔고, 아내는 순대를 팔았다. 이씨가 목숨을 끊기 전날 고양시는 노점상 단속을 했다. 검은 모자와 조끼에 군화를 신은 200여명의 건장한, 이른바 ‘용역깡패’들이 들이닥쳐 포장마차를 부수고 집어던졌다. 2008년 상도동에서는 주민 40여명이 용역에게 이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이들의 폭력을 방치했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에서 용산참사가 벌어졌다.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었다. 농성 전에 이미 ‘용역깡패’가 들이닥쳤다. 유엔과 서울시도 금지한 강제철거가 현실화되면서 옥상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철거민들에게 용역은 분노와 공포의 대상이었다. 용산 남일당 건물에 이어 홍익대 앞 두리반과 명동두리반과 명동의 카페 마리에도 용역깡패는 어김없이 나타나 폭력을 휘둘렀다.

1980년대 후반 재개발사업이 민간 주도로 바뀌면서 철거 용역회사가 생겨났고, 재개발지역은 ‘용역깡패’들의 치외법권지대가 됐다. (중략) 명동 막개발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불리는 ‘카페 마리’에서 용역과 세입자 간 고지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벌어졌다고 한다. (중략) 용역이 주로 하는 일은 ‘깡패’나 다름없다. 문제는 공권력이 이를 용인한다는 점이다. 용역회사가 합법이라고 용역의 공갈·협박·폭행까지 합법은 아닌데도 말이다. 철거용역은 ‘비열함의 민영화’ 내지 ‘폭력의 민간위탁’의 모습을 하고 있다.(경향신문 2011년 8월 5일자, 여적 ‘카페 마리’)


용역깡패들만 부활해 옛날을 재현하는 건 아니다. 구사대도 있다. 구사대를 앞세운 ‘대화와 협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이었다.


구사대 문제를 보도한 경향신문 1989년 1월 9일자 기사. / 경향신문 자료

1988년 3월 10일자 (대원전기) 구로공장 노조지부장 박정엽씨와 관리직 사원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일명 구사대들이 이날 오후 9시 30분쯤 1층 경비실과 3층 종합사무실 창문을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부수고 들어와 농성 중이던 근로자들을 30분 동안 구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농성근로자들의 바지를 벗겨 팬티차림으로 무릎을 꿇린 뒤 전깃줄로 5명씩 손과 발을 묶고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여 농성 해산을 종용했다는 것이다.(경향신문 1988년 3월 10일자, ‘쇠파이프·각목 든 구사대 직원 30여명 농성근로자 무차별 구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씨는 1998년 12월에 ‘교양2’란 글에서 “救社隊. 회사를 구하는 부대? ‘구사대’란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자본가가 만든 조직이다. ‘구사대’라는 이름 속에는 노동조합을 회사를 망하게 하는 불순한 노력으로 보는 이 나라 자본가들의 봉건성과 무지가 담겨 있다. ‘구사대’라는 이름 속에는 때려잡아서라도 노동조합을 깨고 싶은, 노동자의 몫을 한푼이라도 더 자기 몫으로 돌려놓고 싶은 자본가의 파렴치와 욕심이 담겨 있다. ‘구사대’는 야만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야만적 구사대는 2000년대 이후에도 건재하다. 참여정부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경기 부천 세종병원, 기륭전자, 레이크 사이드 골프장, 대교 등 주로 여성 노동자들로 구성된 4개 사업장에서 이름만 ‘용역경비’로 바뀐 구사대들은 차마 믿어지지 않는 방법으로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유린했다. CCTV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게 막아 주차장 등에서 용변을 보게 한 것은 그나마 애교 수준이다.(경향신문 2006년 4월 7일자 사설 ‘아직도 남아있는 구사대 폭력’)


 

용역문제를 풍자한 경향신문 2011년 8월 5일자 장도리.

쌍용차, 한진중, 유성기업, 구미 KEC 등 노동쟁의 현장엔 어김없이 구사대들이 등장했다. 야만의 속성은 그대로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야만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최근 벌어진 많은 일들이 그러하다. 지난 6월 22일, 유성기업 아산공장에선 직장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용역경비원들이 쇠파이프, 각목, 소화기를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했다. (중략) 27일, 한진중공업에선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노동자들이 법원의 강제집행으로 사지를 들린 채 끌려나왔다. (중략) 이런 최근 사태들은 기륭전자, KTX, 이랜드,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등 지난 몇 년간의 노동현장 사건들과 그 본질이 같다. 국가권력과 기업권력이 하나가 되어 국민의 존엄성 위에 군림하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 말이다.(경향신문 2011년 7월 7일자 ‘한국 사회, 야만이냐 문명이냐’)


Posted by 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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